영화로 읽는 마음의 심리학

영화 <스틸 앨리스 (Still Alice)> 기억이 사라지는 순간, 감정은 어떻게 남는가

mindeulle1 2025. 5. 19. 06:44

 

언어학자 앨리스, 정체성의 붕괴를 마주하다

앨리스 하울랜드는 하버드대 언어학 교수로서 명성을 떨치던 지성인이었습니다. 세 자녀를 둔 어머니이자, 존경받는 학자로서 완벽한 삶의 전형을 살아가던 그녀는 갑작스러운 건망증과 실어증 증상을 겪기 시작하면서 일상의 틈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진단명은 ‘조기 알츠하이머’. 지성과 기억이 생존을 가능케 하던 그녀에게 이 병은 곧 정체성의 붕괴를 의미합니다. 언어학자로서 언어를 잃는다는 것은 곧 ‘나’를 잃는 것이었으며, 그녀는 이 무너짐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게 됩니다. 심리학적으로 이 상태는 **'인지적 정체성 해체(cognitive identity dismantling)'**로 정의되며, 자아 개념과 현실 인식의 괴리로 인해 심각한 감정 불안을 동반합니다. 앨리스는 혼란, 분노, 절망, 수치심 등의 복합 감정을 경험하며, 자신이 사라져 간다는 감각에 고통스러워합니다.
 
 

<스틸 앨리스 (Still Alice)> 기억이 사라지는 순간, 감정은 어떻게 남는가
<스틸 앨리스 (Still Alice)> 기억이 사라지는 순간, 감정은 어떻게 남는가

 
 

기억이 사라져도 감정은 남습니다

병이 깊어질수록 앨리스는 과거의 이름, 가족의 얼굴, 심지어 자신의 존재조차 잊어갑니다. 그러나 영화가 말하는 핵심은 “기억은 잊혀질 수 있지만, 감정은 남는다”는 진실입니다. 그녀는 자녀들의 이름을 잊고, 강의실을 찾지 못하고, 집에서 길을 잃지만, 가족을 향한 감정, 사랑과 애착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는 <더 파더(The Father)>에서 앤서니가 딸을 잊어도 외로움과 사랑을 느끼는 장면과도 연결됩니다. 심리학적으로는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보다 감정을 관장하는 편도체가 더 오랫동안 기능한다는 연구 결과와도 부합합니다. 영화는 앨리스의 무너진 일상 속에서 그녀의 감정만큼은 살아 있음을 강조합니다. 관객은 그녀의 흔들리는 눈빛, 애처로운 말투, 조용한 침묵 속에서 아직도 ‘사람’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앨리스를 마주하게 됩니다.
 
 

가족과의 관계  :  보호와 수용, 그리고 정서적 거리

앨리스의 병세가 진행되면서 가족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녀를 받아들입니다. 남편 존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직업과 부인의 간병 사이에서 갈등하고, 큰딸 애나는 감정을 억누르며 책임감 있게 어머니를 돌보려 합니다. 반면, 예술가의 길을 가고 있는 둘째 딸 리디아는 처음엔 거리를 두지만, 오히려 가장 감정적으로 앨리스와 가까워지는 인물입니다. 가족 간의 관계는 이 병으로 인해 단절되기도 하지만,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리디아는 앨리스가 가장 나약해졌을 때 그녀 곁에 앉아 시를 읽어주며, 그녀의 내면을 이해하려 합니다. 이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감정적 동조(emotional attunement)'**의 대표적 사례로, 환자의 인지적 한계와 무관하게 정서적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가족은 치료자가 될 수는 없어도, 감정의 공명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여전히 나입니다” :  자아의 감정적 고백

영화 속 가장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는 앨리스가 환자 모임에서 연설하는 장면입니다. 그녀는 힘겹게 원고를 읽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사라지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나입니다.” 이 장면은 관객에게 정체성과 감정의 분리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울림 있는 장면입니다. 자아란 기억의 총합인가, 아니면 감정을 느끼고 관계를 맺는 그 자체인가? 앨리스는 기억이 사라지는 순간에도 여전히 감정으로 세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증명합니다. 심리학적으로 이는 ‘정서적 자기(affective self)’의 지속성을 의미하며, 치매 환자에게도 자존감과 감정적 반응은 끝까지 유지될 수 있음을 설명합니다. 이 연설은 단지 연민을 자아내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감정의 선언문입니다.
 
 

스틸 앨리스
<출처 : 스틸 앨리스 공식 홈페이지 >

 
 

진짜 치유는 존재의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스틸 앨리스>는 질병의 진행 과정보다 **‘사람이 어떻게 감정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에 집중하는 영화입니다. 앨리스는 결국 말문을 닫고, 자신이 누구였는지도 점점 잊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존재는 끝까지 살아 있습니다. 딸 리디아가 시를 읽어주며 “엄마, 무슨 생각하세요?”라고 묻자, 앨리스는 힘겹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이요.” 이 짧은 한마디는 영화 전체의 감정적 결론이자, 인간 존재의 핵심입니다. 심리학에서 치매 환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약물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를 존중해 주는 정서적 지지(emotional validation)**라고 말합니다. <스틸 앨리스>는 기억이 아닌 감정이, 지식이 아닌 관계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는 사실을 조용히 증명합니다. 치유란 병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데서 시작되는 감정의 여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