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읽는 마음의 심리학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사랑은 어떻게 기억되는가

mindeulle1 2025. 5. 22. 06:17

 

그릴 수 없었던 얼굴, 감정은 준비되지 않으면 담을 수 없습니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Portrait de la jeune fille en feu, 2019)> 의 시작은 초상화를 그리는 장면이지만, 실은 감정을 알아보는 시간입니다. 마리안은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의뢰받지만, 엘로이즈는 결혼을 강요당하는 상황에서 초상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리기 위해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알기 위해 함께 걷고 관찰하는 시간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화가와 모델이 아닌, 두 사람의 감정이 서서히 열리는 순간입니다. 마리안은 처음 완성한 그림이 엘로이즈의 감정을 담지 못했음을 깨닫고 스스로 그림을 지웁니다. 이는 감정을 단순한 외형으로 환원하지 않으려는 태도이며, 심리학적으로는 '감정 감식력(emotional intelligence)'의 성숙한 사례입니다. 감정은 억지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존중과 응시를 통해 깊어지는 것임을 이 장면은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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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사랑은 어떻게 기억되는가

 

 

불꽃처럼 타오르는 감정은 말보다 깊게 남습니다

두 사람의 감정은 빠른 고백이나 극적인 충돌 없이 진행됩니다. 대신, 눈빛과 침묵, 손끝의 머뭇거림 같은 미세한 감정 표현을 통해 서로의 내면을 들여다봅니다. 엘로이즈의 드레스에 불꽃이 옮겨 붙는 장면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감정의 점화를 상징합니다. 심리학적으로 이는 억눌린 감정이 무의식적 표현을 통해 분출되는 ‘상징화(symbolization)’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정서적 긴장 속에서 서로에게 다가가며, 말로는 할 수 없는 감정의 언어를 공유합니다. 침묵 속에 흘러가는 시간과 감정은, 언어보다 더 오래 기억 속에 남습니다. 감정은 때로 불처럼, 강렬하지만 조용히 타오르는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끝을 알기에 더 깊은 감정이 존재합니다

마리안과 엘로이즈는 둘 다 이 사랑이 오래가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정해진 결혼, 귀족 여성의 운명, 시대의 벽은 그들의 관계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예견된 끝은 감정의 농도를 더욱 짙게 만듭니다. 심리학적으로 이는 ‘한계가 있는 관계(boundary-bound intimacy)’ 속에서 나타나는 정서적 집약 현상으로, 짧지만 깊은 관계가 오히려 더 높은 감정적 몰입을 이끌어냅니다. 감정은 영원하지 않지만, 그 순간의 진실함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마리안이 떠나는 순간, 엘로이즈가 “뒤를 돌아보라”고 말하는 장면은 그들의 관계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신화의 현대적 전환으로 작용함을 보여줍니다. 돌아보는 순간, 감정은 완성됩니다.

 

 

끝을 알기에 더 깊은 감정이 존재합니다
< 출처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공식 홈페이지 >

 

 

감정은 기억 속에 그림처럼 남습니다

이별 후 마리안은 엘로이즈의 모습을 자신의 그림 속에 담고, 전시장에서 우연히 그녀를 마주하게 됩니다. 비발디의 '사계: 여름'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엘로이즈의 모습은 단순한 회상 장면이 아닌, 기억과 감정이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입니다. 이는 감정 기억(emotional memory)의 대표 사례로, 음악, 이미지, 공간을 통해 감정이 되살아나는 현상입니다. 감정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의식 깊숙한 곳에 저장되어 있다가 특정한 순간에 되살아나는 기억의 파장으로 존재합니다. 이 장면은 타큐멘터리 영화 <마이 옥토퍼스 티처>에서 주인공이 문어와의 이별을 통해 감정의 흐름을 자연처럼 받아들이는 태도와도 이어집니다. 감정은 결코 과거에 머물지 않습니다. 기억은 그림이 되고, 감정은 그 그림의 색이 됩니다.

 

 

관계의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삶에 스며듭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퀴어 서사를 넘어, 감정이 어떻게 관계를 통해 기억되고 남는지를 조용히 증명하는 영화입니다. 사랑은 비극으로 끝나지만, 감정은 그 속에 축적된 진실로서 잔존합니다. 영화가 조용하고 서정적인 리듬으로 전개되는 이유는, 감정의 지속성과 여운이 소리보다 더 길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적으로 이는 ‘감정 전이(emotional transference)’가 무의식 속에 작용해 삶의 방향성을 바꾸는 현상으로 설명됩니다. 마리안은 더 이상 엘로이즈를 만날 수 없지만, 그녀와 나눈 감정이 자신의 삶에 예술과 존재의 지향을 남깁니다. 감정은 관계의 흔적으로 남고, 삶을 향하게 합니다. 사랑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스며드는 감정의 흔적으로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