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읽는 마음의 심리학

<패스트 라이브즈 (Past Lives, 2023)> 선택과 감정의 여운을 따라가는 치유의 심리학

mindeulle1 2025. 5. 25. 06:15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이민과 사랑, 말하지 못한 감정을 중심으로 시간과 기억을 탐색하는 감정 심리학적 작품입니다.

 

과거의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삶을 감싸 안습니다

<패스트 라이브즈 (Past Lives, 2023) >는 어린 시절 첫사랑이었던 두 사람이 시간과 대륙을 넘어 다시 마주하는 이야기입니다. 12살의 나영과 해성은 서울에서 친구 이상의 감정을 품지만, 나영의 이민으로 인해 이별하게 됩니다. 12년 후, 뉴욕에 살고 있는 나영(이제 ‘노라’)은 해성과 다시 온라인으로 연결되지만, 결국 각자의 삶을 선택하며 또 한 번 멀어집니다. 그리고 또다시 12년 후, 해성이 뉴욕을 찾아오며 감정은 다시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이 구조는 단지 재회의 로맨스가 아니라, 시간이 지났음에도 사라지지 않은 감정이 어떻게 사람의 삶을 구성하는지를 보여주는 서사입니다. 심리학적으로 이는 ‘감정 기억(emotional memory)’의 지속성에 대한 이야기이며, 감정은 잊히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lt;패스트 라이브즈 (Past Lives, 2023)&gt; 선택과 감정의 여운을 따라가는 치유의 심리학
<패스트 라이브즈 (Past Lives, 2023)> 선택과 감정의 여운을 따라가는 치유의 심리학

 

 

선택과 운명 사이, 감정은 어디에 닿을 수 있을까요?

영화의 핵심 키워드는 '인연(因緣)'입니다. 불교에서 유래한 이 개념은 인물들이 서로 다른 삶을 선택했지만, 과거의 인연이 여전히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상징적 장치로 활용됩니다. 노라는 현재의 남편과 함께 미국 시민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지만, 해성과의 감정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여전히 정체성과 감정의 일부로 남아 있습니다. 심리학적으로 이는 '선택한 삶과 감정의 유예' 사이의 갈등으로 볼 수 있으며, 특히 이민자의 정체성 혼란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해성은 한국을 대표하는 과거의 상징이고, 노라는 현재의 자신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감정은 과거와 현재를 선형으로 연결하지 않고, 복합적이고 겹쳐진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이 영화는 선택과 감정이 서로 충돌할 수 있다는 현실을 조용히 말해줍니다.

 

 

감정은 말보다 오래 남고, 말하지 못할수록 깊어집니다

영화 속 인물들은 많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침묵 속에서 흐르는 감정의 밀도는 오히려 말보다 더 강하게 전달됩니다. 해성과 노라는 다시 만나 오랜 이야기를 나누지만, 결정적인 말은 끝내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관계는 다음 생에서 어떤 모습일까요?"라는 해성의 질문에, 노라는 대답하지 못한 채 눈물을 흘립니다. 이는 감정이 반드시 해소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존재를 구성하는 또 하나의 층위임을 보여줍니다. <리틀 라이프>에서 감정이 극단적 고통으로 나타났다면, <패스트 라이브즈>에서는 말하지 못한 감정이 어떻게 오래 남고, 삶의 일부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서사 구조입니다. 감정은 표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 강하게, 더 오랫동안 남습니다. 이는 감정 심리학에서 말하는 ‘비언어적 감정 기억(nonverbal emotional imprint)’에 해당합니다.

 

 

감정은 말보다 오래 남고, 말하지 못할수록 깊어집니다
< 출처 : 패스트 라이브즈 공식 홈페이지 >

 

 

감정은 회복이 아니라 통합의 과정입니다

노라는 해성과의 만남 후에도 남편 아서와 함께 남습니다. 이는 로맨틱한 재회가 아닌, 감정을 인식하고도 자신의 삶을 다시 받아들이는 선택입니다. 이는 단지 과거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자신의 삶 속에 통합하는 심리적 성숙의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심리학적으로 이는 '감정의 통합(emotional integration)'이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가능성을 하나의 감정 체계로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노라는 감정을 해성에게로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감정을 억누르거나 외면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속에 그 감정을 자리잡게 만든 것입니다. 이는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서 리가 상처를 품고도 삶을 유지하려 했던 것처럼, 감정을 해결의 대상이 아닌 존재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감정은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내는 것입니다.

 

 

말하지 못한 감정이 우리를 지탱하는 이유입니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사랑과 이별, 선택과 감정의 경계에서 인간이 어떻게 감정을 품고 살아가는지를 묻는 영화입니다. 단순한 이별의 이야기가 아닌, 감정을 통해 삶의 정체성을 구성해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노라는 해성과의 감정을 지우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간직한 채 현재를 살아갑니다. 해성 역시 감정을 고백하지 않지만, 감정을 마주하며 한층 더 어른이 됩니다. 이는 감정 심리학에서 강조하는 ‘성숙한 정서적 수용’의 대표적 사례이며, 감정은 표현되지 않아도 우리 안에 존재하며, 그 존재가 우리의 삶을 지탱할 수 있다는 점을 말해줍니다. <쁘띠 마망>에서 과거와 현재의 엄마가 만났던 것처럼, <패스트 라이브즈>는 현재의 자신이 과거의 감정을 포용하는 이야기입니다. 감정은 말보다 오래 남고, 때로는 삶 전체를 지탱하는 힘이 됩니다.